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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힘입니다 정진권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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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사망을 이기는 힘이다.

고전15:50-58

 

1. 종교는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다 있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의존의 감정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다루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것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해답을 주어야 합니다.

 

대부분 종교는 선행과 덕행을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착하게 살면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산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도 선행을 하며 사는 것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을 통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죄의 문제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2. 죽음에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다른 것 다 내어주어도 교회가 내어주지 말하야 할 이슈가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어르신들 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율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1위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버드 대학 샌달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예일대학 셀리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지난 20년 간 최고의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죽음학이 대학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라는 책을 쓴 이 여령 교수는 <모멘토 모리 Mmento Mori> 젊은이들에게 죽음을 매일 죽음을 생각하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하는 용기 Aspice Mortem> 죽음에 직면하여 용기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직면하게 하면 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천국 가는 네비게이션을 제시하는 교회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기능을 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미래의 영원한 도성을 가리키고, 증거 하는 기능을 행사하는데 실패한다면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회 비전은 세계에서 큰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이 좋고 좋은 지역에 위치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인들을 잘 살게 하고, 부자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고, 천국 가는 길을 분명히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3. 기독교는 죽음이 어디에서부터 왔으며, 죽음을 해결하는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는 종교입니다. 죽음이 어디에서부터 왔습니까? 죄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5:15) 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에 걸려 있습니다. 죄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죄를 짓고서 죄의 값만 치를 수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나랏돈을 해먹으면 그 값을 치르고 돈을 갚으면 석방되고, 갚지 못하면 징역살고, 징역으로도 다 갚지 못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반역한 죄가 아니라면 천냥 정도면 무죄로 석방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죄의 값을 치르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4. 기독교는 자력구원(自力救援)의 종교가 아니라 타력구원(他力救援)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죄악에서 구원할 수 없을 만큼 왜곡되고, 타락되었다고 봅니다.

 

아담이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죄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 값을 치를 수 있었다면 에덴동산에서 그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아담의 피를 받은 인간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아담처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공허하게 살다가 죽어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다 무효로 만듭니다. 어떠한 제국도 무너지지 않는 제국이 없고, 영웅호걸도 무덤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 부귀영화 공명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헛된 꿈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은 남긴 사람이라고 할지라고 죽음은 인간을 단번에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아무리 잘 생긴 미남 미녀라도 죽어보십시오. 아무리 여색을 좋아하는 바람둥이라 할지라도 죽은 미녀를 안고 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다 공평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만듭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피와 혈을 가진 인간들이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것을 아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저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하여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 길 밖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를 이룰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온 사망진단서는 휴지쪽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하고 반복해도 지나침이 없는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0)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바울은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차별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차별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의인과 죄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구원에 조건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있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3:10-12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18입니다.

 

5. 영혼구원 받고, 죄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아십니까? 사도바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얻으려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달려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3:11).

 

코페르니쿠스는 세계 정신사의 역사를 뒤집어 놓을 만큼 저명한 천문학자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하는 항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천주교의 천동설을 깨고 나온 갈릴레오(Galilei Galileo)의 지동설도 여기에서 나왔고, 루터의 종교개혁의 원리도 코페르니쿠스의 전환(轉換)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위대한 과학자가 세상을 떠날 때의 유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여! 나는 사도 베드로에게 주신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 한 강도에 주신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라고 구원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 안 사람이었습니다.

 

6. 부활을 어떻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사망의 권세를 이긴 것입니다. 부활은 사망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사망을 이긴 자는 부활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의 영이 내 안에 계심으로서 내가 영생에 잇고, 천국에 잇대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눈 먼 소년이 방패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연은 하늘 높이 날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얘야! 너는 네 연이 땅에 떨어졌는지, 하늘로 날아가 버렸는지 어떻게 알고 연을 날리는 거냐?” 라고 물었습니다. “아저씨 저는 제 연이 지금 하늘 높이 날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넌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아이인데 어떻게 네 연이 하늘을 날고 있는지아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지금 제가 잡고 있는 이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제 연이 얼마나 힘차게 하늘을 날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무덤이 빈어 있는 것을 확인한 적이 없습니다. 도마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손으로 만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의 연줄을 잡고 있음으로 방패연이 푸른 하늘을 훨훨 날고 있는 것을 보듯이, 믿음의 줄을 잡고 날마다 부활의 소망을 실고, 저 하늘 높이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비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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