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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길 정진권 202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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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길

22:21-35

 

1. 발람이 누구인가? 모압평지에서 모압과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 부름 받은 예언자입니다. 발람은 브올의 아들이고, 메소포타미아 브돌 지방의 유명한 복술가입니다. ‘발람이란 이름의 뜻은 탐닉하는 자, 백성을 파괴시키는 자란 뜻입니다.

 

이방인으로 하나님께 부름 받고 선지자로 모세를 돕게 하였으나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패역의 길로 간 선지자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면서 가나안의 족속을 가는 곳 마다 무너뜨리고, 가장 강력한 아모리 족속까지 이겼다는 소식을 들은 모압 왕 발락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모압왕 발락이 발람의 신통함을 알고, 모압 장로들을 보내어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모압을 축복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모압의 장로들이 복채를 가지고 발람에게 찾아갔습니다. 발람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잠을 자며 기다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첫 번째 발람 선지자의 허점이 있습니다. 돈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라고 청하는데 일단 하나님께 물어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사람을 선지자로 사용하셨을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인정하시는 분입니다. 회개하고 결단하고 돌아온 발람을 받으셨지요.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과 같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부름 받아 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온 사람입니다. 발람 선지자는 이방인으로서 복술쟁이 짓하다가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그 마음이 다시 돌아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돈 뭉치를 보고 안 돌아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2. 발람 선지자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들 저주하지도 말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22:12).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압의 장로들을 돌려보냈습니다(22:13).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발람의 마음에 변동이 없습니다.

 

모압 왕이 다시 발람에게 더 놓은 고관을 보내고, 더 많은 재물을 가지고 발람에게 왔습니다. 왕의 친서 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아무것도 꺼리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시행하리이다”(22:17). 얼마나 달콤한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왔지만, 뱃속 깊이 숨어 있던 탐심에 불을 붙였습니다.

 

발람이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말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그러나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22:19)). 여기에 발람 선지자의 두 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와 계획과 목적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모압으로 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금은보화와 모암 왕이 보낸 메시지에 마음이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것이 중합니다.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천국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입니다. 어디 메 쯤 가다가 죽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방향만 분명하면 가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패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방향만 분명하면 하나님이 다 간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이미 발람의 마음을 아시고 발람이 가는 길을 막지 아니하셨습니다. 다만 내가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고 말씀하시고 허락하셨습니다. 발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갔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갔습니다.” 22:3 말씀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발람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시행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길을 떠난 것은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발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마음이 어디를 향하여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발람은 말씀을 들었지만, 그의 탐욕을 따라 갔고, 아브라함은 말씀을 듣고, 그의 말씀에 따라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갈파한 하나님의 사자가 패역으로 가는 발람의 길을 막고 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발람이 타고 가는 말 앞에 섰습니다.(22:22). 발람은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서 길을 막고 있는 대도 불구하고 자기의 뜻과 의도대로 모압으로 가는 길을 진행시켜 나아갔습니다탐심으로 가득찬 발람의 눈으로 하나님의 사자가 보였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씩이나 때리는 것입니까”(22:29). 발람이 말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나를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내가 너를 죽였으니라” (22:29). 말이 발람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렇게 버릇이 없었습니까”(22:30). 말과 선지자가 말다툼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4.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발람의 눈을 열어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모압으로 가는 자기의 길을 막기 위하여 서 있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함으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았느니라”  22:32 말씀입니다.

 

이 쯤 했으면 두 말 없이 자기의 길을 포기하고, 자기결단대로 모압으로 가던 길을 돌아섰어야 합니다. 발람은 다시 공을 여호와의 사자에게 던집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길을 막으려고 선 것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기뻐하지 아니하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22:34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결단을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결단해야 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다른 사람에게 신탁(神託)을 청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신탁은 무당이 하는 짓이지 하나님의 종이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자기 결단이 중요합니다결국 발람은 모압으로 지기가 가던 길을 갔습니다.


여기 까지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입니다. 탐심에 잡힌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 잘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5. 성경은 발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의지대로 간 발람을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바른 길을 떠나 패역의 길로 간 예언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벧후 2:15, 1:11).

 

그 후 발람은 싯딤 지역에서 예언자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바알브올에게 제사하고 음행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여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진중에서 이스라엘 남자들과 브올의 여자가 음행하는 것을 창으로 뚫어 꿰어서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였습니다(25).

 

이 사건은 모압과 미디안이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 젊은이들을 타락시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려고 한 사건인데, 발람이 이 사건에 깊이 개입된 것입니다(31:16).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꾀어서 이방신을 섬기고 혼음을 묵인한 것입니다.

 

6. 발람 선지자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명하여 미디안을 치던 날 미디안의 다섯 왕과 함께 발람도 처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31:8).  발람 선지자는 이방 사람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선지자 반열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언자로 사역하고, 하나님의 영광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무시하고 패역의 길을 간 사명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발람 신앙은 이중적이었습니다.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신앙과 바알 신앙(monmonism)의 사이에서 두 다리를 걸치고 사역하다가 망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노릇도 하고 부귀영화도 누리고, 세상의 권세도 갖고요.(bothand).   참새와 부엉이 싸움판에 낮에는 새의 편을 들고, 밤에는 부엉이 편을 들며 왔다 갔다 하다가 싸움이 끝난 다음에 버림받은 박쥐의 운명과 같습니다. 박쥐가 문제입니다. 코로나19도 박쥐의 소행이 아닙니까?

 

7. 하나님은 온전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좋아하실 뿐 만 아니라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을 마지막까지 시험하는 것이 바로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브라함이 온전히 하나님의 믿고 의지하는지 그것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시험하신 것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냐 저 것이냐(eitheror)”, 결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고 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에 온전히 올(all) (100) 맞은 사람이 있습니다. 갈렙입니다.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수기14:24입니다. 코로나19  펜다믹 상황 가운데 있지만, 갈렙의 믿음으로 돌파해 나아갑시다.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가족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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