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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뱀을 바라보자 정진권 202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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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바라보자

21:4-9

 

1.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갠 날만 있고 비가 오는 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의 밭이나 믿지 않은 사람의 밭이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동일하게 내려주십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떻게 그 상황에 대처하느냐? 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차이입니다.

 

긍정의 믿음입니다. 긍정의 믿음과 긍정적인 사고(positive thinking)는 차원이 다릅니다. 긍정적인 사고는 인간의 가능성을 초점을 두는 시각입니다.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긍정적 사고입니다. 그러나 긍정의 믿음은 인간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방식은 참 좋은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긍정의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는 성공지향적인 사고입니다. 그러나 긍정의 믿음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고 감사하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 에너지입니다.

 

상황이 터졌을 때 무엇을 바라보느냐? “문제를 보고, 나를 바라보느냐아니면 문제를 보고, 주님을 바라보느냐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상황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문제와 씨름하고 싸우다가 결국 그 상황 속으로 빠져 들어가 죽고 말지만, 상황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무한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기마병이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서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물이 없는 사막 길을 사흘씩이나 걸어가서 마라에서 우물을 발견했는데 마라의 우물은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여름의 홍수 철에 물이 바다처럼 흐르는 요단강을 건너가야 할 때가 있었고, 요단강을 건너가 보았더니,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가로막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를 대적하다가 뱀에 물려 죽고, 땅이 꺼져죽고, 염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성인 60만이 애굽에서 출발하여 광야로 나왔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이 훠히 보이는 바란 광양에서 12지파의 장수들을 뽑아 가나안 땅을 탐지하라고 보낸 적이 있습니다. 10지파의 장수들과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똑같은 지역을 보았으나 열 지파의 장수들은 본 대로 보고 하였습니다.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보고 자신들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이 메뚜기 와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거민을 죽이는 땅이라고 보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같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왔으나 저들과 달랐습니다. 저들은 우리들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 하였습니다. 희망을 가져왔습니다.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열 지파 장수들은 기골이 장대한 아낙 자손만 바라보았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믿음의 원리입니다.

 

3. 무엇을 바라보느냐? 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광야에 이르자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모세가 길을 잘못 인도하여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불 뱀을 풀어 징계하였습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비돔성을 떠나 애굽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서 시내산에 올를 때까지의 역사입니다. 출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대적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고 치리하고 죽이지 않습니다. 기적을 나타내서 깨우치시고, 말씀으로 가르치는 방식이 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다릅니다. 신명기에서는 때리시고 징계하시고 치리하였습니다. 핫다아와에서는 백성들이 만나를 먹으며 고기 달라고 불평하자, 바다에서부터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 실컷 먹게 하셨지만 먹다가 목에 걸려 죽게 하였습니다.(11:34). 아론의 제사권에 저항하는 고라 자손을 땅에 묻으셨습니다.(16:35). 백성들이 일어나 모세 때문에 죽었다고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병으로 14.700 명을 염병으로 죽이셨습니다.(16:49).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고, 하나님과 아직 언약을 맺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지 않았을 때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알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을 받고 그리스도를 배도하는 죄도 마찬가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말씀하셨습니다.( ). 부지 중에 모르고 짓는 죄와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다릅니다.

 

4. 모세가 또 하나님께 뱀을 떠나게 해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대 위에 불 뱀을 만들어 매달게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살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구리 뱀을 바라본 사람은 살고, 모세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고 믿지 아니하고 구리 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구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믿고 바라보는 자는 구원을 받고, 불신하고 바라보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3:15입니다.

 

구리 뱀을 만들어 놓고 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산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나사렛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저를 바라보는 사람은 저주를 받지 아니하고 산다는 것처럼 허무맹랑한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형은 로마의 형벌 가운데 가장 부끄럽고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부끄러운 방법을 이용하여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인하여 저주받고 지옥형벌 받을 인간을 위해 제2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매달으셨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매달아 놓고 쳐다보는 자를 구원한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시고 저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5. 아담이 뱀에 의하여 저주를 받고 징계를 받았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아담에게서 비롯된 저주로 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무엇을 하느냐?’ 라는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1-2입니다.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과 더 나은 삶을 기대 할 수 없는 무의미한 삶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집중하십시오. 시간을 낚으십시오. 이 시간이 지나가면 됩니다. 깊은 밤이 지나가면 새벽이 오는 것입니다. 새벽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6. 예수님께서그렇 게 철저히 믿음 생활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들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함으로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종교생활을 한 것이지 믿음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이러한 믿음을 종의 믿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종처럼 어렵게 종교생활하지 마시고, 아들처럼 쉽게 믿음 생활하십시오. 종은 주인 일하지 아니하면 불안하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종은 집에서 쫓겨납니다. 아들은 공부하면서도 놀면서도 집에 들어와 어머니에게 밥 달라고 고치치고 반찬 부실하다고 소리칩니다. 요새는 딸들이 더 무서워요. 아버지 집에서 살고 어머니가 밥 해주는 것을 먹어가면서도 소리를 높이며 살아요. 쫓겨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집 나갈까 두려워요.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입니다.

 

저는 요한 웨슬리가 말한 종의 믿음과 아들의 믿음을 첩()의 믿음과 조강지처(糟糠之妻)의 믿음으로 비유합니다. 첩의 믿음은 안자서 일하지 아니하면 불안해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계속 남편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강지처는 아들 딸 두셋만 낳아놓으면 시 아버지 앞에서도 누워서 밥을 먹어도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서 구원에 이르려고 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어려운 구원의 길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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