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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 정진권 202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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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

14:8-18

 

1. 사도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설교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서 몇 가지 믿음 생활하는데 있어서 기본이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말씀에 집중하는 믿음입니다. 여기서들었다"에코우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그냥 들은 것이 아닙니다. 집중하여 들었다는 뜻입니다. 먹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하여 듣고 먹는 것과 같이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아멘 아멘 응답하며 말씀을 먹으며 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생길 때 말씀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 믿음이 생깁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병이 치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서 듣고, 말씀을 먹는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레나의 말씀으로 들려질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합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 혼과 영을 변화시키고 심지어 관절과 골수, 육신을 쪼갭니다.

 

사도바울이 앉은뱅이을 주목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했다아테니죠라는 단어입니다. 행전 3장에서 베드로도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에게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쓰여진 단어도 아테니죠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바울의 눈을 고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눈이 맞은 것입니다. 나의 눈빛과 예수님의 눈빛이 마치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려운 당할수록 보통 우리는 상황에 주목합니다. 말씀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주목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환난 당하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네로 황제의 환난을 겪고나온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두스드라의 앉은뱅이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사용한 믿음, 파스티스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파스티스는 단순히 사건을 보고 믿고 인식하고 시인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투자하고, 목숨을 걸 수 있는 큰 확신입니다. 누가 위탁합니까? 가치를 아는 사람이 위탁합니다.

 

마태복음13:46의 천국비유 가운데 밭에 감춘 진주 비유가 있습니까? 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파라서 보화가 감추어 있는 밭을 삽니까? 보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확신이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과 확신에서부터 어떤 문제도 해결 받을 수 있다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파스티스,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병을 고치고, 기적을 만든 루스드라의 앉은뱅이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씀에 집중한 믿음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말씀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이 사람은 일어나 걸으라는 바울의 말씀을 믿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이 사람은 믿는 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3.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자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굉장히 놀라게 됩니다.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고 소리를 지르며 모여 들었습니다. 바나바를 보고는 "쓰스"라고 했고 바울을 "허메"라고 불렀습니다. 쓰스는 제우스신을 말하는 것이고 허메는 제우스신의 대변하는 신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소를 끌고, 화관을 들고 와서 사도들에게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철저히 거절하였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뛰어 들어가서 소리쳤습니다.“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두 사도는 "우리는 신이 아니다 너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십니까.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4. 우상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서 절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피조물을 숭배하는 일입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나무든, 돌이든, 산과 바다 하늘 어떤 것이든지 피조물이 숭배 대상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20:4-5)

 

하나님이 절대적인 가치가 되지 않고, 다른 가치가 것입니다. 그것이 돈 일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사람이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부자를 보십시오. 한 혈통이 우상화 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양심이 돌 수도 있습니다. 내 이성적 판단이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내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우상처럼 무서운 우상이 없습니다.

 

절대라는 말을 쓰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는 것을 피하라고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도 하지 말고, 땅으로도 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6:35-36). 머리로도 하지 말라라고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 집단적 우상이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의 의견이 우상일 경우가 많습니다. 선과 악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다수의견이 옳고, 소수 의견이 무시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허점입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이념(이데오로기)가 우상입니다.

 

19세기 20세기 서구라파는 맑스 레닌 주의가 우상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척도였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 어록이 모든 가치의 척도였습니다. 모택동이 말씀이라면 사형수도 살아 납니다. 지금 북한의 주체사상이 바로 모든 북한 사회와 정치와 문화와 사람을 움직이는 우상입니다.

 

5. 보이는 우상가운데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우상이 있습니다. 표적에 따라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병을 고친다고 하면 이 기도원에 가고, 저 기도원에서 기적이 일어났고 가면 저 기도원으로 모려갑니다, 유행에 따라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엄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을 보세요. 한 때는 바나바와 바울을 신이라고 엎드려 절하더니, 유대인의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선동하니 달려들어 바울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시신을 집어 던졌는데 다행이 살아나 데베로 갔습니다. 군중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그렇게 찬양하고 따르던 무리들이 불과 이틀이 지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6. 성경적 신앙,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없습니다. 노아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되지 않고 계속인간으로 살았습니다. 노아는 홍수이후에도 노아일 뿐입니다. 포도원을 경작하며 사는 농부일 뿐입니다. 자식들 앞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하는 아버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침저녁으로 만나고 센달하나 신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을 만난 모세도 인간입니다. 죄을 짓고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처럼 섬김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의 숭상이 될 수 있는 가능이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신상이라고 세워놓고 섬긴다면 하나님의 보좌에서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하겠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모세를 사랑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적인 죄가 아닙니다. 윤리적인 죄가 압니다.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람을 사람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나의 경험과 이성을 절대적으로 믿고. 하나님보다 유행하는 철학과 사상이 삶의 척도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적과 이적을 보고 믿고 따르는 믿음에서 보지 않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보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율법으로 우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상으로 우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타나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은 정의로운 본이면서도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고, 바르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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