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8(왕상) | 이미순 | 2022-10-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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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가 되고(왕상1-2장), 솔로몬 왕의 역사(왕상3-11장), 그리고 왕국의 분열(왕상12-22장)]
<열왕기상‧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왕정기 역사, <열왕기상>은 곧 다윗 왕이 죽은 후, 슬기로 이름난 솔로몬 왕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왕상1~11장).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북)과 유다(남)으로 분열된 왕국을 다루고(왕상12~22장, 왕하1~17장) 그리고 이스라엘 멸망 후 유다 왕국의 역사(왕하18~25)를 다룹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과는 성격이 아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타고난 전술가인 다윗과는 달리 솔로몬은 왕국의 내부 행정 체제를 갖추는데 골몰하였고 외교와 경제 관계를 통하여 왕국의 존립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오랜 평화기를 선사했던 솔로몬의 통치 아래에서 문화와 경제는 전성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타락으로 태평성대(열왕기상4:20-25)는 끝났습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대적이 없었다면(왕상5:4) 이제는 안팎으로 대적들이 일어납니다. 솔로몬은 유브라데에서 아카바 만까지 이르는 다윗의 대 왕국을 한데 결속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왕국의 가장자리 여기저기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남동쪽의 에돔 사람들과 북쪽의 아람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왕상11:14-25). 왕의 모순된 태도가 끼친 영향으로 하나님 백성이 분열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에게도 가차 없이 닥칩니다. 곧 하나님이 솔로몬에게서 빼앗기로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두 번이나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왕상3:5, 9:2). 이렇게 직접 만나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솔로몬을 다윗 및 이스라엘의 나중 왕들보다 더 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와 부의 복을 받은 솔로몬의 타락은 심각했습니다. 솔로몬은 본디 모습의 창조질서(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음)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을 대표합니다(왕상4:29-34). 솔로몬의 실패와 또 솔로몬과 더불어 망하기 시작한 이스라엘의 운명은 사람의 원죄와 그 결과에 대한 뚜렷한 보기가 됩니다(창세기3장).
왕의 타락으로 인한 슬기롭지 못한 내부 정책(왕상11:28) 때문에 해묵은 남북 대립 관계가 악화되어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왕국 ‘유다’와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됩니다.
솔로몬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을 중앙 성전(왕상6장과 8장)으로 갖추고, 언약궤를 성전 안에 들여다 놓음으로써 이 성소는 하나님 백성 한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그 성소를 통해 하나님 백성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및 나중에 생겨난 유대교의 중심점이 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열지파가 다윗 왕조를 섬지기 않겠다고 한 것은 자기들의 자유로운 권리가 제약받고 자기들이 부당하게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역사서의 판단에 따르면 왕국의 분열은 솔로몬이 노년에 이방인 아내들의 유혹에 빠져 우상숭배에 따른 형벌입니다(왕상11:1-13). 왕국이 갈라진 뒤로는 두 나라의 역사를 따로 나누면서도 서로 관련시켜 다루는데, 두 나라의 왕들도 이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늘 충성하는지 또 오로지 그만을 섬기는지의 여부에 따라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새로 세워진 북왕국의 왕정은 이 척도를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 첫 왕 여로보암 1세(B.C926-907)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맞설 만한 매력적인 것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곧 북왕국의 남쪽 경계에 있는 ‘벧엘’과 북쪽 경계에 있는 ‘단’, 두 곳에 왕국 성소를 세워 이들을 예루살렘의 경쟁상대로 삼은 것입니다. 이 두 성소에서는 황금 수소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겼습니다(왕상12:20-32). 이러한 탈선을 가리켜 ‘여로보암의 죄’라 하는데, 북왕국이 전 역사를 통해 이 죄를 저지르다가 마침내는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이 신명기 역사서의 판단입니다(열왕기하17장). 그러나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여로보암 이후 벌어집니다.
* 독일성서공회 해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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